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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한(恨)'의 공포와 2020년대 '생존'의 공포

by 덴므 2025. 9. 1.

어두운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속삭임에 숨을 죽였고, 식탁 밑에서 마주친 섬뜩한 존재에 비명을 질렀던 기억.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우리는 '한(恨)'이라는 지독한 정서로 촘촘하게 직조된 한국적 공포에 열광했습니다. 하지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 2020년대의 스크린은 억울한 원혼 대신 좀비 떼와 무너지는 아파트,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픽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시절의 공포가 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서늘한 잔상을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단순히 연출 기법의 차이를 넘어, 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 '공포의 근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90년대의 '한'과 2020년대의 '생존', 두 키워드를 통해 대한민국 공포 영화의 변천사를 더욱 깊이 있게 들여다봅니다.

1. 억압된 것들의 귀환: 90~00년대 '한(恨)'의 공포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한국 공포 영화의 심장에는 '한(恨)'이 있었습니다. 한이란 억울함을 풀지 못해 쌓이고 응어리진 슬픔과 분노의 정서이며, 이는 당시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패배감과 무력감의 정서와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당시 공포 영화 속 귀신들은 이유 없이 인간을 해치는 절대악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억압적인 입시 위주의 교육 시스템 속에서 개성을 잃고 희생된 학생('여고괴담')이거나, 가부장제 아래 숨겨진 추악한 비밀과 폭력의 기억이 만들어낸 원혼('장화, 홍련')이었습니다. 이들의 공포는 갑자기 튀어나와 놀래키는 '점프 스케어'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음산하고 축축한 분위기, 기괴하지만 명확하게 핵심을 보여주지 않는 미장센, 그리고 날카로운 비명보다 더 심장을 옥죄는 정적과 불협화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관객의 심리를 서서히, 그리고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카메라는 귀신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리는 흐느낌 섞인 발소리, 화려한 꽃무늬 벽지 뒤에 숨겨진 섬뜩한 얼룩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 주는 불안감에 집중했습니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너머의 보이지 않는 존재를 스스로 '상상'하게 만드는 고도의 심리전이었습니다. 보이지 않기에 더 무섭고, 그들의 슬픈 사연을 알기에 더 마음 아픈 공포. 우리는 스크린 속 귀신이 무서우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겪었을 고통에 깊이 연민하고 감정적으로 동기화되었습니다. 결국 '한'의 공포는 단순히 무서운 이야기를 넘어, 당시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억압했던 여성, 학생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서늘한 메아리와도 같았으며, 영화가 끝난 후에도 쉽게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찝찝하고 서글픈 감정의 잔여물을 남겼습니다.

2. 살아남아야 한다: 2020년대 '생존(生存)'의 공포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공포 영화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한'이 깃든 원혼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좀비, 바이러스, 연쇄살인마,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 시스템이 차지했습니다. 이제 공포의 질문은 "귀신은 왜 억울한 일을 당했는가?"에서 "나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로 명확하게 바뀌었습니다. 영화 '#살아있다'에서는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창궐한 아파트에 고립된 개인의 생존기를,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대지진 이후 유일하게 남은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주민들의 처절한 생존 투쟁을 그립니다. 이곳의 공포는 더 이상 심리적이거나 은유적이지 않습니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물리적이며, 즉각적입니다. 언제 문을 부수고 들어올지 모르는 좀비 떼와, 생필품 하나를 두고 어제의 이웃과 싸워야 하는 현실적인 위협이 공포의 핵심 동력입니다. 연출 역시 느린 호흡으로 분위기를 쌓아가기보다, 빠른 편집과 역동적인 핸드헬드 카메라 워크, 그리고 뼈와 살이 부서지는 소리까지 담아내는 극사실적인 사운드와 CG를 통해 숨 쉴 틈 없이 관객을 몰아붙입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경험한 사회적 단절과 고립의 공포, 심화되는 경제 불황과 부동산 문제, 그리고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 등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현실의 불안을 직접적으로 투영합니다. 귀신의 존재보다 당장 내 옆집 사람이 더 무서울 수 있고, 초자연적인 저주보다 사회 시스템의 붕괴가 더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는 시대. 2020년대의 '생존' 공포는 바로 이러한 현대 사회의 불안을 가장 빠르고 자극적인 방식으로 반영하며 관객에게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 공포도 변한다

결론적으로, 90년대 공포가 '과거의 억압'에서 비롯된 심리적 불안과 부채 의식을 다루었다면, 2020년대 공포는 '현재와 미래의 생존'에 대한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위협을 다룹니다. '한'의 공포가 끝난 뒤에도 찝찝한 여운을 남기며 "그 귀신은 왜 그랬을까?"라는 사회 구조적 질문을 곱씹게 만들었다면, '생존'의 공포는 심박수가 터질 듯한 긴장감이 끝난 뒤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땠을까?"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공포라는 장르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장 깊은 불안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어떤 귀신을 무서워하고 어떤 재난에 공감하는지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사회의 모습을 역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억압된 자의 슬픔에 공감하던 사회에서, 각자도생의 처절함에 몰입하는 사회로. 한국 공포 영화의 변천사는 지난 20여 년간 우리 사회의 불안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기록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은 스크린 속 귀신이나 좀비가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두려워하게 만드는 현실 그 자체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