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어느 골목, 빼곡히 들어선 원룸 건물. 굳게 닫힌 현관문 너머로 며칠째 불이 꺼져 있습니다. 스마트폰 속에서는 수백, 수천 명의 친구와 연결되어 최신 밈을 공유하고 웃음을 터뜨리지만, 정작 현실의 공간 속에서는 아무도 그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리고 몇 달 뒤,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비극적인 뉴스가 전해집니다.
‘고독사(孤獨死)’.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단어를 홀로 사는 노인들의 쓸쓸한 마지막과 연결 지었습니다. 하지만 2025년 대한민국에서 이 비극은 더 이상 노년층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꿈과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20대, 30대 청년들이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례가 끔찍한 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불행이나 우울증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청년 고독사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얼마나 철저히 붕괴되었는지, 그리고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서로를 돌아보지 않는 무정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사회가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고통스러운 증거입니다.
'실패'가 곧 '고립'이 되는 사회
청년들이 세상과 단절되는 첫 번째 관문은 바로 ‘경제적 어려움’과 그로 인한 ‘사회적 실패’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집값, 살인적인 취업난,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 부채의 굴레 속에서 요즘 청년들은 사회에 나오자마자 거대한 벽과 마주합니다. 과거에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붙잡아주는 가족과 공동체라는 울타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울타리는 너무나도 헐거워졌습니다.
부모님 세대 역시 각자의 노후를 책임지기 벅찬 경우가 많고, 인스타그램 속 화려한 성공 신화와 나를 비교하게 만드는 치열한 경쟁 사회는 실패한 사람을 ‘낙오자’로 낙인찍습니다. 한번의 실직, 사업 실패, 혹은 작은 실수만으로도 청년들은 순식간에 빚더미에 앉고, 재기 불가능의 상태로 내몰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도움 요청'이 아니라 '나의 실패를 고백하는 수치'가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경제적 기반이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사회적 관계도 끊어지기 시작합니다. 친구를 만나 밥 한 끼 먹는 것도, 경조사를 챙기는 것도 모두 돈이 드는 세상에서 가난은 곧 고립으로 이어집니다.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둔 청년들은 우울증과 무력감에 시달리고, 이는 다시 구직 활동의 어려움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됩니다. 결국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지 않는 사회, 실패한 이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사회가 청년들을 스스로 세상과 문을 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1인 가구 1,000만 시대, 끊어진 사회적 연결망
청년들의 고립을 심화시키는 또 다른 원인은 ‘물리적 환경’의 변화입니다. 대한민국은 이제 1인 가구 1,000만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거주하는 원룸, 오피스텔 등은 철저히 개인의 사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이웃과의 교류는 완벽히 차단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그 사람이 며칠째 보이지 않는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청년 세대는 그 어느 때보다 ‘연결된’ 세대처럼 보입니다. SNS를 통해 수시로 소통하고, 온라인 게임에서 팀을 이뤄 밤을 새웁니다. 하지만 이 ‘디지털 연결망’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연약합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며칠째 바뀌지 않는다고 해서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음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온라인에서의 ‘좋아요’와 댓글은, 현실의 고독과 절망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타인의 행복한 순간만을 전시하는 SNS는 고립된 청년들에게 더 큰 박탈감과 우울감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동네 가게 주인이나 통장님, 혹은 종교 단체와 같은 느슨하지만 촘촘한 ‘오프라인 연결망’이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아프거나 힘든 이웃을 발견하고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연결고리가 끊어진 도시에서, 청년들은 수많은 군중 속 가장 외로운 섬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각자도생'을 넘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청년 고독사 문제의 해결은 단순히 우울증 상담 예산을 늘리거나, 청년 수당 몇 푼을 쥐여주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을 바꿔야 하는 문제입니다. 개인의 불행을 ‘네 탓’으로 돌리는 각자도생의 문화를, 아픈 사람을 함께 돌보는 ‘사회적 책임’의 문화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실직이나 질병으로 위기에 처한 청년들을 국가가 더 빨리 발견하고, 주거와 의료, 그리고 재기를 위한 심리적 지원까지 제공하는 ‘선제적 복지 시스템’이 절실합니다. 또한, 청년들이 저렴한 비용으로 함께 모여 밥을 먹고 교류할 수 있는 '공유 주방'이나 '커뮤니티 공간'을 지자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정신 건강 상담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춰 감기처럼 쉽게 상담받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인식 변화입니다. 내 옆집에 사는 청년에게 건네는 어색한 눈인사, 힘들어 보이는 친구에게 "밥 한 끼 하자"고 먼저 내미는 손길. 이런 작고 사소한 관심들이 누군가에게는 세상과 연결된 마지막 끈이 될 수 있습니다. '오지랖'이 사라진 자리에 최소한의 '인간적인 관심'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청년 고독사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명의 청년이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쓸쓸히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습니다. 내 이웃의 침묵이 그저 조용한 것인지, 아니면 살려달라는 비명인지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각자도생의 정글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마지막 안전망이 되어줄 수 있는지 시험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