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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낳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청년들은 왜 출산을 포기했나?

by 덴므 2025. 9. 3.

합계출산율 0.6명대.

이제는 숫자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이 통계는,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꼴찌이자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인구 소멸의 속도를 보여주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입니다. 정부는 지난 20년간 수백조 원의 예산을 쏟아부으며 출산율을 높이려 했지만, 결과는 보시다시피 처참한 실패입니다.

기성세대는 말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기적이라 아이를 낳지 않는다.”, “개인의 행복만 좇는다.” 과연 그럴까요? 정말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아이가 싫어서, 혹은 나만 편하고 싶어서 인류사적 소멸을 자처하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청년들은 그 누구보다 아이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한 생명의 무게를 ‘너무나도’ 무겁게 느끼기에, 그리고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기에, 차마 아이를 낳을 ‘결심’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지옥 같은 현실 앞에서 내 아이만큼은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는 처절한 ‘이타적인 포기’에 가깝습니다.

아이 한 명에 '억' 소리 나는 나라: 경제적 현실의 벽

청년들이 출산을 포기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바로 한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 드는 천문학적인 ‘돈’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최소 20년간 수억 원이 들어가는 거대한 경제적 프로젝트를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우선, 아이를 낳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 즉 ‘집’이 없습니다. 수십 년 월급을 꼬박 모아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 사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신혼부부들은 비좁은 원룸이나 오피스텔에서 신혼을 시작합니다. 이런 공간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출산의 문턱을 넘어도 현실은 더 가혹합니다. 분유값, 기저귀값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사교육 시장’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휘말리게 됩니다. 남들 다 보내는 영어 유치원, 예체능 학원 하나 보내지 않으면 내 아이만 뒤처질 것 같다는 불안감. ‘아이의 행복’을 위해 시작한 사교육은 이내 가계의 허리를 휘게 만드는 족쇄가 됩니다. 대학 등록금까지 생각하면, “아이 한 명 키우는 데 4억이 든다”는 말은 더 이상 과장이 아닙니다. 결국 대한민국에서 ‘출산’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 아닌, 엄청난 경제적 안정과 계층적 자신감을 가진 일부 상류층만이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사치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칼퇴'와 '육아휴직'은 딴 세상 이야기: 일과 육아를 병행할 수 없는 사회

경제적 문제만큼이나 출산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은, 아이를 낳는 순간 ‘개인의 커리어’에 치명적인 브레이크가 걸리는 사회 구조입니다. 이는 더 이상 여성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남성의 육아휴직이 보장되어 있지만, 현실의 직장 문화 속에서 아빠가 육아휴직을 쓰는 것은 여전히 ‘승진 포기 각서’에 서명하는 것과 같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동료들의 업무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눈총과, 복직 후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많은 남성들이 제도를 알면서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육아의 무게는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쏠리게 되고, 이는 곧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여성만의 희생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가계 전체의 소득 감소와 불안정성 심화로 귀결됩니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구조 속에서, 부부 중 한 명의 경력이 멈추거나 소득이 줄어드는 것은 출산을 망설이게 하는 매우 현실적인 이유가 됩니다.

결국 대한민국 청년들은 '아이의 곁을 지키는 부모’가 되는 것과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직장인’이 되는 것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 받고 있습니다. 아이가 아플 때 눈치 보지 않고 연차를 쓰고, 정시 퇴근 후 가족과 저녁을 함께 보내는 당연한 일상이 ‘꿈’처럼 여겨지는 사회.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없는 이 구조적인 문제 앞에서, 많은 청년들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는 계획 자체를 유보하거나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아이'는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 무한경쟁 사회의 비극

마지막으로, 청년들은 아이에게 이 지옥 같은 ‘무한경쟁’의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현실은 안정된 미래가 아닌, 여전히 불안한 오늘과 불투명한 내일뿐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온 청년들에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내가 겪었던, 혹은 나보다 더 치열할지 모를 경쟁의 트랙에 내 아이를 밀어 넣는 것과 같다고 느껴집니다. 아이가 새벽같이 일어나 학원 뺑뺑이를 돌고,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며, 수능 점수 하나에 인생의 희비가 엇갈리는 삶을 살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즉, 청년들의 출산 포기는 우리 사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불신임 투표’입니다. 이 사회가 한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확신이 없기에, 아이를 낳아 그 불행의 굴레에 동참시키지 않겠다는 마지막 저항인 셈입니다. 아이 울음소리가 줄어드는 것은 단순히 인구가 감소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행복지수’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입니다.

단순히 돈 몇 푼을 쥐여주는 출산 장려금이나, 비현실적인 육아 정책으로는 이 거대한 흐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청년들이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회, 즉 평범하게 벌어도 집을 살 수 있고, 남녀 모두 경력단절을 걱정하지 않으며, 아이들이 과도한 경쟁 없이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근본적인 대수술 없이는, 이 나라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조용한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