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5년 국민연금 기금 고갈.’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이 섬뜩한 문구는 대한민국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겁니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국민연금. ‘언젠가는 돌려받겠지’라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성실하게 납부하고 있지만, 마음 한편에는 ‘내가 낸 돈, 정작 내 노후에는 받지 못하는 거 아냐?’라는 깊은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의 2040세대는 이 불안감의 정점에 서 있습니다. 부모 세대를 부양해야 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부양받지 못할 첫 번째 세대. 그런 우리에게 국가가 약속한 최후의 사회 안전망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은 단순한 뉴스가 아닌, 생존에 대한 실존적인 위협으로 다가옵니다.
정부는 계속해서 ‘개혁’을 이야기하지만, 그 개혁안은 언제나 ‘더 내고, 늦게 받는’ 고통 분담만을 강요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과연 2055년이 되면 내 연금은 정말 ‘0원’이 되는 걸까요? 이 끝나지 않는 논란의 핵심과,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을 것 같은 우리 노후의 진실을 마주해 보겠습니다.
2055년, 정말 내 연금은 '0원'이 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2055년에 연금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서 ‘고갈’이라는 단어가 주는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연금 재정추계에서 말하는 ‘기금 고갈’은,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적립금(쌀독의 쌀)이 바닥을 드러낸다는 의미이지, 연금을 지급할 능력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국민연금은 기본적으로 내가 낸 돈을 나중에 돌려받는 ‘적립 방식’과, 현재의 젊은 세대가 낸 보험료로 현재의 노인 세대를 부양하는 ‘부과 방식’이 혼합된 형태입니다. 2055년에 기금이 고갈된다는 것은, ‘적립 방식’으로 운영되던 시스템이 완전한 ‘부과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그때가 되면 그해에 걷은 보험료로 그해에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땜질식’ 운영이 불가피해진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이때 미래 세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입니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연금을 낼 사람은 급격히 줄어들고, 받을 사람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죠. 전문가들은 이 시점이 되면 미래 세대가 소득의 30~35%를 연금 보험료로 내야 현재와 같은 수준의 연금 지급이 가능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결국, ‘0원’은 아니지만, 약속했던 금액보다 훨씬 적은 돈을 받거나, 미래 세대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더 내고, 늦게 받고' 말고는 답이 없나
이 시한폭탄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전문가들이 내놓는 개혁안의 핵심은 언제나 ‘더 내고, 늦게 받고, (어쩌면) 덜 받는’ 것입니다. 듣기만 해도 화가 나는 이야기지만, 왜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그 속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내고 (보험료율 인상)’: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소득의 9%입니다. 이는 OECD 평균인 18.2%에 비하면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제도를 설계할 때부터 저부담-고급여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적자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험료율을 점진적으로 12~15% 수준까지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늦게 받고 (수급 개시 연령 상향)’: 현재 만 63세인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66~68세, 혹은 그 이상으로 늦추자는 방안입니다. 평균 수명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현실을 반영하고, 연금 재정의 지출 시점을 최대한 늦춰 기금 고갈을 막아보려는 의도입니다.
이 두 가지 방안은 프랑스, 스웨덴 등 연금 개혁에 성공한 대부분의 국가가 선택했던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물론 ‘소득대체율(생애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을 조정하여 ‘덜 받는’ 방안도 논의되지만, 이미 OECD 최하위권인 노인 빈곤율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쉽지 않은 선택입니다. 결국,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는 ‘지금 세대가 조금씩 더 부담하고 미래 세대의 짐을 덜어줄 것인가’, 아니면 ‘폭탄 돌리기를 계속하다가 미래 세대에게 모든 짐을 떠넘길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청년 세대의 불신, 그리고 연금의 미래
이 모든 논의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청년 세대의 깊은 ‘불신’입니다. 90년대생과 00년대생에게 국민연금은 ‘국가가 보장하는 든든한 노후’가 아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단계 금융’처럼 느껴집니다. 이들의 불신은 단순히 이기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저성장 시대에 태어나 평생 불안정한 고용과 자산 폭등을 경험한 이들에게, 수십 년 뒤의 미래를 국가에 저당 잡히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짊어져야 할 부담은 기성세대보다 훨씬 큰데, 돌려받을 혜택은 더 적을 것이라는 예측이 계속해서 나오니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국민연금은 단순한 금융상품이 아니라, 현 세대와 미래 세대 간의 ‘사회적 약속’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들은 이 약속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들의 불신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개혁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연금 운용의 투명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청년 세대가 개혁 논의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며, 개혁으로 인한 고통을 모든 세대가 공평하게 분담하고 있다는 신뢰를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국민연금 개혁은 ‘인기 없는 정책’이라는 이유로 역대 정부가 계속해서 미뤄온 숙제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시간은 없습니다. 지금의 고통을 외면하는 대가는, 우리 아이들 세대가 감당해야 할 훨씬 더 큰 절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내 노후를,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는 것은 결국 ‘나’와 ‘우리’의 책임 있는 선택과 사회적 합의에 달려있습니다.